7. 새언약

7. 새언약


[예레미야에서 나타난 새언약]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예레미야 31장 31-34절)

새 언약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과 세워진 언약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언약이었다.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을 약속하시며 그로 말미암아 모두가 주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을 충족시키시고(마태복음 5:17),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에 새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 오셨다. 성도는 새 언약 아래 있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율법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성도는 이제 구원이라는 거저 받는 선물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에베소서 2:8-9).

새 언약은 모든 언약의 마침이며 성취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다른 언약들보다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의 옛 언약은 사실상 보다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을 기대하였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옛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다른 보다 새로운 의미를 가진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새 언약은 구약의 옛 언약과 전혀 다른 성격의 언약이 아니고 옛 언약과 그 본질을 같이하고 있음으로 절대적 의미에서의 새로운 언약은 아닌 것이다.

옛언약과 새언약의 구분은 예레미야 31:31과 성찬제정의 말씀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여러 번 발견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레미야 31장 32절에서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땅을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문자적으로는 여기서 옛 언약은 모세언약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는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하심으로 새 언약과 모세의 율법을 대조하고 계시며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서는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말씀하심을 볼 때 바울은 옛 언약을 모세의 율법체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9장 1절 이하에서도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이야기함으로 히브리서 기자 역시 옛 언약을 모세의 율법체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 언약에서는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필요하였으나 앞으로는 제사장이나 특별한 임무를 맡은 선지자 등과 같은 중재자들과 그들이 옛 언약에서 작동시켜왔던 교육적인 제도들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에서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알 것이고 그 지식은 직접적인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성령님 안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질 것임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에스겔 16장 63절에는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고 말한다. 이 어구에서 나오는 ‘야다’(עדי )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앎으로 번역할 수 있다 부부가 아는 관계를 의미한다. 지적인 지식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그것은 마음의 지식이며 사랑을 필요로 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라고 기록된 요엘 2장 27절의 말씀은 새 언약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새 언약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만인이 똑같이 가지는 특권도 아니요 또 교제를 돕기보다는 방해하는 그런 머리(지성적)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그리고 전적으로 동화가 되어 버린 그런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것이며 영원한 생명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하나시며 하나님 안에 거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를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가 일어난다. 예레미야 31장 34절에서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은 옛 언약하에서도 이미 존재했었다. 예레미야는 죄가 옛 언약 아래서 용서함 받았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미 죄를 용서할 것에 대해서 약속하셨고 이와같은 약속은 옛 언약하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죄 용서는 제사를 통한 제도화된 접근체제와 한데 묶여 있었다. 하나님은 제사제도를 통하여서 죄를 용서하였다.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징벌의 위협이 사라지며 계약은 결코 파기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옛 계약 아래서 약속의 실현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옛 계약이 아무 효력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죄였고 그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일에서 풍성해질 것이다.

선지자들에게 있어 죄사함은 메시야 시대의 축복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었고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 예수와 서기관들 사이의 논쟁은 예수가 죄를 용서하심을 선언하셨을 때에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의 선언을 실제로 이룩하셨다. 죄사함은 선지자들이 종말론적 나라에서 있을 것을 약속하셨던 것을 사람들이 현세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예수의 인격 가운데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에스겔서에 나타난 새 언약의 약속]

예레미야 31장 31-34절의 새 언약처럼 에스겔의 영원한 언약도 역시 죄의 용서를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 의하여 율법이 백성의 마음에 있어야 한다고 진술되었듯이 에스겔의 언약에서도 새 마음과 새 영이 약속되었다(에스36장 27절). 순종은 율법의 새로운 조항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촉진 될 것이다.에스겔 36장 27절에서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서 행할지라”

이것은 예레미야의 새 계약을 담은 약속이고 바울 신학에서는 복음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율법의 내면화로 말미암아 순종을 촉진하도록 약속하였던 것과 꼭 같이, 에스겔의 새 언약도 하나님의 영이 심령에 임하심을 통해 순종을 확실케 할 것이다.

포로귀환 사건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대한 소망의 성취를 어느 정도 나타내었다. 분명히 그것은 외적인 회복을 나타내었으며 그 이후에는 우상숭배를 했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나 혹은 명백한 기록이 더 이상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포로귀환은 완전한 치료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새 언약에 관한 예언이 휠씬 더 근본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성취]

예수께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새언약의 성취가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포도주가 새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맹백하게 말씀하였다. 이 말씀들은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선지자에 의해 예견된 소망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날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면서 식탁에 있는 떡()을 하나 집어들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셨다. 잠시 후에 그는 포도주 잔을 취하여 축사하신 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고전11:23-25) 또는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14:24)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나눠 주셨다.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신 것은 예수께서 몸을 내어 주신 일과 피를 흘리신 일로 말미암는 은혜를 그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표였다. 떡과 잔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실 주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그 나라에 참여한다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그 언약에 포함되며 하나님 나라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성찬식을 이렇게 시작하심으로 자신의 피흘림과 새 언약의 제정을 연관시켰다. 그분의 피는 언약을 인준하는 피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려진 피이며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선언한 ‘새 언약’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대속적 죽음의 일반적인 성격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피흘리심은 성도들의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은 죄사함을 위한 최종적인 성례였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제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한결같이 담고 있다. 구약의 제도들 역시 나름대로 효력을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제도들이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효력을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근복적인 해결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 주께서 행하신 성찬식은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정하신 새언약에서 볼 수 있는 심대하고 중심된 사상은 예수님의 죽음이 전적으로 대속적 제사이며 옛 언약하에서 상징되어 오던 모든 것의 성취라는 것이다주의 만찬은 구약에서의 유월절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완성하신 구원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새언약의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6장 6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파기한 모든 죄인들의 저주를 홀로 담당하신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또한 그 분은 언약 아래 계시며 동시에 언약을 세우시는 분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시라는 점에서 이중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는 성격상 왕이시지만 고통을 담당해야 할 주의 종이며, 백성에 대한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도록 지명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인 것이다. 이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은 결정적인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분은 율법을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사하려고 다시 말해 계약적 저주의 희생제물로서 죽으심으로 부르심을 입은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다(9:15). 그리스도는 옛 언약하의 범죄의 총 결과를 담당함으로써 그 저주로부터 우리들을 구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옛 계약안의 범죄를 지워버릴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 계약의 축복된 상태로 인도하고 있다.

창세기 1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은 곧 첫사람 아담을 의미한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났고 마지막 아담은 죄의 몸이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부터 태어나는 몸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첫사람 아담은 마지막 아담의 흔적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아담은 첫사람 아담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첫사람 아담은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으로 말씀하신 가죽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 가죽 옷은 마지막 아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옷이 된다. 마지막 아담은 죽어야 할 첫사람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나타낸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첫째, 옛사람인 첫사람 아담의 죄를 제거해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죄를 없앨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죄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간이 죄와 싸울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 이유는 너희들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제사를 통해서 창세기 3 15절에서 약속한 언약의 씨를 기억하라는 것이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그 여인의 후손이 바로 메시야인 것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첫사람 아담으로서 사람들에게 죄의 몸을 주고, 마지막 사람 아담으로서 의의 몸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마지막 사람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 율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죄목은 신성모독죄로 죽은 것이다. 유대지도자들이 죄목을 신성모독죄로 붙혔지만,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첫사람 아담속에 있는 죄(하나님처럼 되고 싶은)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결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을 하고 죽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를 그도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를 물세례로 표현했다


로마서 6 3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그리고 로마서 6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는 자는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한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을 표현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드려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물세례는 죄를 씻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죄의 씻음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물은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부활시키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해결된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물세례를 상징한다. 그래서 두번째로 육체로부터 받은 혼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혼으로 갈아 입어야만 한다. 혼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먼저 불에 타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3 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누가복음 12 49-50절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은 불과 성령세례를 상징한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혼은 죽고, 하늘로부터 오는 혼(영의 몸)을 받는 것이다. 이를 부활이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 44-45절에서『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사람 아담은 생령(프슈케:)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프뉴마)이 되었나니.』부활을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육체는 반드시 죽고, 혼이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혼의 구원이다. 베드로전서 1 9절에서『믿음의 결국 곧 영혼(프쉬콘) 구원을 받음이라』영혼으로 번역되었으나, 헬라어 프쉬콘(ψυχν)은 혼을 의미한다.

 

부활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이루어진다. 부활이 이루어진 사람을 성도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어야 성도인 것이다. 로마서 6 4-5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성도가 되면 그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성전이 세워지면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돌 성전이 무너진 것 같이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의 성이 무너지고 새사람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이전의 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는 것이며, 소속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율법이 아니라, 하늘의 성령의 법에 적용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심령 속에는 고착된 옛성전의 흔적과 새성전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성도는 마음을 새성전(지성소)에 집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를 신약성경에서 휘포모네라고 한다. 개역개정에서는 인내로 번역했는데, 심령 속의 옛성전이 유혹하므로 환란(들맆세서)과 같은 모습이 전개되는 것이다. 들맆세서를 환란으로 번역했는데, 지성소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압박이다. 계속 마음은 옛성전으로 인하여 요동친다. 그래서 성도가 심령 속의 지성소에 집중하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14 12절에서『성도들의 인내(휘포모네)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텐 피스틴 예수)을 지키는 자니라』

 

참 성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며 함께 부활한 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지성소)이 세워지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담대하게 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날마다 죄를 용서받으려고 성소의 마당에서 왔다갔다 하는 자들인 것이다. 날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의 피를 요구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를 날마다 죽이는 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날마다 자기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날마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므로 그들은 율법에 따라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십사만사천이라는 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자가 된다. 이를 셋째 하늘 또는 천년왕국이라고 한다. 십사만사천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숫자의 이름이다. 구약시대 성소는 열두지파가 둘러싸고, 성소주위에는 열두명의 레위인들이 성소를 지켰다. 그래서 12 12를 곱하면 144가 된다. 여기에 완전한 하나님의 수(알레프) 1000을 함께 하면 십시만사천이 된다.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지성소를 지키는 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지성소가 이루어 졌으므로 그래서 성도를 십사만사천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활한 성도에게 신성한 이름을 부여한다. 깨닫는 자만 알게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나, 성경에는 휴가라는 말이 없다. 데살로니가전서 4 16-17절에서『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이 말은 성도의 심령 속에서 일어난 부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성도가 육체가 있으므로 이러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으나, 마음으로 깨닫고 서로 위로 하라는 말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지성소가 세워지면, 하나님이 성도의 심령 속의 지성소로 들어오신다. 그래서 성전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부활하고, 함께 승천했으며, 함께 재림한 것이다. 골로새서 3 3절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데살로니가 전서 4장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 부활한 성도와 주님이 만나는 장면이다. 물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둘째 사망에 처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살아있을 때 둘째 사망을 거친 것이다.

 

요한복음 3 5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첫번째 사망은 물심판 때 죄에 대해서 죽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두번째 죽음은 성령과 불세례이다. 그래서 성도 역시 부모로부터 받은 혼이 불에 타 죽은 자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가 된다. 이를 요한일서 5 7-8절에서 증언한다.『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물은 물세례, 성령은 불과 성령세례인 것이다.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의 죽음을 증거하는 말이다.

 

하늘로부터 성령으로 태어난 자가 거룩한 자인 것이다. 베드로전서 1 15절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성도가 어떤 성결한 삶을 통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를 통하여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순종이고, 거룩한 행실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가 성도 안에,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서로 하나가 되어, 음성을 듣고 서로 말하며, 그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모든 것이다. 거룩하게 되려면 무조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조건은 죄의 몸이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대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모두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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